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베트남 가는 비행기 안에서 박찬욱 감독의 영화 〈아가씨〉를 보았다. 사실 이 영화와는 초면이 아니다. 몇 번이고 돌려보았고, 감탄했고, 몰랐던 부분들을 찾아내며 오래 좋아하다 잠시 잊고 살았던 것뿐. 네 시간 반이라는 불편한 비행을 뭘 하며 보낼까 고민하다 조금 충동적으로 아가씨를 골랐다. 내가 알아본 미장센이나 연출들이 과연 영화의 몇 할을 이루고 있을지 가늠이 되지 않아 참 아쉽다. 영화를 조금 더 정확하게 보는 눈을 기를 수 있었더라면 할 말이 아주 많을 텐데.
 
  아가씨는 비 오는 날 기차를 타고 왜놈 집의 하녀로 들어가는 주인공을 배웅하는 보영당 식구들에서 시작한다. 원작은 세라 워터스의 장편 소설 핑거 스미스, 배경은 일제 강점기다. 영화의 시작 부분에서 장댓비가 내리는 길을 일본 군복을 입은 군인들이 열을 맞춰 지나고, 그뒤를 조선인 아이들이 돌림 노래를 부르며 좇는다. 아기를 업은 끝단은 보영당을 떠나는 주인공들을 바라보며 발을 동동 구르고 운다. 그 왜놈 집에는 내가 갔어야 했는데. 네가 아니라 내가 하녀로 들어갔어야 했는데. 그렇게 주인공 김태리는 빗길을 나서며 처조카에게 장가를 들려고 하는 씨, 씨, 씹새끼의 대저택으로 향한다. 자동차로 정문을 지나 한참이고 더 가야 본관 건물이 나오는 코우즈키 대저택으로 들어서는 주인공은 조선 이름 ‘옥주’에서 딴 타마코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일본식과 영국식, 한국식 양식이 혼합되어 있는 커다란 저택의 건물들은 위압감과 함께 외딴곳에 동떨어져 버린 듯한 기분마저 느껴지게 만드는 장치가 되었다. 화면에 가득 들어차는 박찬욱식 미학이 돋보이는 시작이었다.

  몸종 타마코가 모시게 될 아가씨의 이름은 이즈미 히데코. 아가씨와의 첫 만남은 아가씨의 방과 마주보고 있는 벽장의 이불 개는 칸에서 잠이 든 타마코를 깨우는 비명 소리였다. 악몽을 꾸는 듯 몸부림을 치며 일본어로 어머니를 찾는 김민희의 연기가 참 좋았다. 그런 히데코를 가만히 토닥이며 남숙희는 보영당에서 아기들을 달랠 때 부르던 노래를 가만히 부른다. 그 장면부터 모든 애착이 예견되었는지도 모른다.

 
 

다들 나를 타마코, 불쌍한 조선인 하녀라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내 진짜 이름은 남숙희다.
– 영화 〈아가씨〉 속 숙희의 대사

 

  그리고 장면은 전환된다. 하녀 타마코의 진짜 이름은 남숙희. 불쌍한 조선인 하녀도, 옥주도 아닌 숙희다. 숙희는 날 적부터 보영당에서 지내며 은포 최고의 장물어미 복순 씨의 손에 자라며 다섯 살 때부터 진짜 돈과 가짜 돈을 구별할 줄 알았다. 구가이에게서는 가짜 도장 파는 법을, 끝단이에게서는 소매치기 기술을 두루 익힌 몸이라는 말씀. 이 보영당은 온갖 불법적인 일을 도맡아 하며 훔친 물건을 다시 되팔고 버려진 아기들을 씻기고 입혀다 일본에 팔아넘긴다. 이 장면에서 가장 인상적인 건 숙희의 본질적인 모성애다. 낳자마자 버려져 곧바로 일본으로 팔려 나가는 아이들을 보며 숙희는 제 새끼 말고는 젖을 주지 않는 끝단을 이해하지 못한다. 나도 젖이 나오면 얼마나 좋을까. 이 아기들을 다 먹여 줄 텐데. (그리고 정말 아기처럼 키운 아가씨에게 젖을 물리는 사이가 된다……) 보영당의 실체가 드러나고, 후지와라 백작이 등장한다. 여기서 백작과 숙희의 계획이 드러난다.
 
  유산을 물려받을 예정인 일본인 아가씨 이즈미 히데코와 그 아가씨의 후견인을 자처하며 곧 처조카에게 장가를 들 예정인 왜놈 호소인 코우즈키 노리아키의 대저택으로 숨어들어 유산을 상속받을 아가씨를 꿰어내 도망치는 계획. 그리고 그 아가씨를 정신 병원에 처넣고 유산만 홀랑 먹는 게 후지와라가 설명한 대단한 계획이다. 주인공 숙희는 아가씨의 옆에 딱 붙어서 백작과 아가씨가 사랑에 빠지게끔 옆에서 살살 꿰어내는 역할을 맡게 되는데, 백작의 주머니에서 물건을 슬쩍 훔치던 숙희는 생각한다. 사랑? 사기꾼이 사랑을 아나?
 
  히데코의 모친은 히데코를 낳던 도중 죽어 버리고, 그의 남편마저 병을 얻어 다섯 살쯤 이모와 이모부의 손에 이끌려 이 저택으로 오게 된다. 아가씨가 될 나이까지 오로지 그 저택에서만 지내며 낭독회 연습을 하거나 산책을 나가는 등의 지루한 생활만을 반복했다. 일본인이 되고 싶어 조선인 마누라를 버리고 데릴사위로 들어간 코우즈키의 아내는 진작 죽었고, 그 죽은 마누라의 여동생의 딸을 후견인으로 들여 재산을 상속받기 위해 그는 새 장가를 들 준비를 한다. 그런 거지 같은 저택에서 세상 물정을 하나도 모르는 얼굴을 하고 자신을 마주한 이즈미 히데코를 바라보며, 남숙희는 속으로 ‘염병, 예쁘면 예쁘다고 미리 말을 해 줘야 할 것 아냐?’하고 어리숙한 모습을 보인다.
 
  둘의 첫 만남에서 오간 대화들은 영화의 끝물에 가서 곱씹어 보면 재미있는 것들 투성이다. 글을 읽을 줄 모른다는 사실을 숨기며 천연덕스럽게 넘어가려다 결국 그 사실이 탄로났을 때, 숙희는 아가씨가 읽어 달라고 부탁한 편지를 꾹 쥐고 손을 바르르 떨다 고백한다. 읽을 줄 몰라요, 아가씨. 내내 일본말을 쓰며 거짓말을 하던 숙희가 조선말을 쓰며 톤 자체가 변하는 장면이 흥미롭다. 전혀? 그럼 조선 글은? 대답 없는 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히데코는 하얀 종이에 조선 말로 타마코, 옥주의 이름을 적어 건넨다. 네 이름이야. 어떻게 쓰는지는 알아야지. 절묘하게 가려진 화면과 연출은 여전히 그 수상한 저택만큼이나 비밀스럽다. 글 같은 거 배우면 그만이고, 욕을 해도 좋고 도둑질을 해도 좋은데, 나한테 거짓말만 하지 마. 알았니?
 
  영화가 전반부가 전개되는 내내 히데코는 숙희에게 호의적이다. 첫날 하녀 무리와 조금 동떨어져 밥을 먹던 타마코의 신발 한 짝이 사라져 있는 장면에서 숙희는 욕을 하며(하...... 요 씨발 것들을 진짜) 버선을 벗고 맨발로 빗길을 걸어온다.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히데코는 자신의 신발장을 열어 숙희에게 신발을 고를 수 있도록 한다. 숙희의 앞에서 보석이나 값비싼 옷들을 꺼내들고, 숙희는 그런 히데코가 낭독회 연습을 간 사이 아가씨의 옷들을 멋대로 꺼내 입어 보며 물건들을 뒤지다 녹색 상자에서 뱀처럼 똬리를 튼 두꺼운 밧줄을 발견한다. 정오가 되면 와서 문을 두드려 달라는 아가씨의 말에 숙희는 약속된 시간이 되자 코우즈키의 낭독회장으로 향하고, 멋대로 그 경계에 발을 들이려는 숙희를 보며 아가씨의 이모부는 소리친다. 뱀! 낭독회장 앞에는 머리를 치켜든 자그마한 뱀 동상이 있고, 숙희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셔터를 내린 히데코의 앞에서 코우즈키는 말한다. 명심해라! 뱀은 ‘무지의 경계선’이다! 만년필 잉크에 혀가 뱀처럼 거멓게 변한 코우즈키가 알약을 삼키는 장면을 보며 숙희는 말한다. 아, 뱀이다. 무지의 경계선. 이모가 목을 매단 벚나무에 걸려 있던 커다란 밧줄이 꼭 뱀과도 같아 재미있는 장면이었다. 무지의 경계선. 넘게 되는 이상 절대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앎과 모름의 경계. 밧줄일 수도, 이모부일 수도, 낭독회장의 입구일 수도 있는 것.
 
  둘의 성적 긴장감은 점차 극에 달한다. 이 영화의 명장면으로 손꼽히는 목욕탕 씬은 꽤나 노골적일 정도로 섹슈얼하다. 욕조에 무릎을 끌어안은 채 들어가 발그스레 상기된 뺨으로 사탕을 먹던 히데코는 눈물이 맺힌 얼굴로 말한다. 입안이 자꾸 베여. 이 하나가 뾰족한가 봐. 그 말에 숙희는 살짝 벌어진 히데코의 입안으로 직접 손가락을 넣어 천천히 뾰족해진 이를 갈아낸다. 말없이 입안으로 손가락을 밀어넣는 동안 숙희의 시선은 히데코의 곳곳을 향한다. 눈, 뺨, 입술, 가슴, 새하얀 살결이나 자신을 올려다보는 눈망울 같은 것. 약간의 정적 끝에 손을 떼어낸 숙희에게 히데코는 말한다. 너두 들어올래? 솔직히 이 장면을 보고도 히데코와 남숙희의 이야기가 전우애 혹은 해방에 의한 여성 연대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기지가 않았다. 나는 금방이라도 숙희와 히데코가 입술을 맞대지 않을까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보고 있었다…….
 
  이 영화는 화면을 굉장히 넓게 쓰는 게 눈에 띄는데, 치장한 히데코 아가씨가 저택의 본관으로 들어설 때 숙희가 문을 활짝 여는 장면은 시각적으로 꽤나 깊은 여운이 남는 것 같다. 이때 나오는 나레이션이나, 아름다운 히데코를 보며 숙맥 같은 얼굴로 치는 하정우의 회심의 대사 따위가. 타, 타, 탁월하게 아름다우십니다! 시선을 따라 움직이는 장면들. 화면의 이동과 배경으로 깔리는 음악까지도. 화면 안에 포함되는 모든 것들을 아름답게 찍으리라는 박찬욱의 의지 같은 게 보인 씬이었던 것 같다.

 

 

여지껏 내 손으로 씻기고 입힌 것들 중에, 이렇게 예쁜 것이 있었나?
– 영화 〈아가씨〉 속 숙희의 대사

 
 

  이렇게 해 놓으니까 너도 아가씨 같다. 그치? 제 옷이나 장신구들을 숙희의 앞에서 꺼내고, 펼치고, 심지어는 인형을 가지고 놀듯 입혀 놓는 히데코는 이렇게 말한다. 숙희는 욕심을 숨길 수 없는 눈으로 그것들을 한참 바라본다. 나중에는 숙희의 그런 시선이 온전히 히데코에게 향한다는 사실이 재미있는 것 같기도 하다. 아가씨들의 옷을 입은 숙희를 보며 히데코는 말한다. 백작님 말씀, 알 것 같아. 네 얼굴, 자려고 누우면 생각나더라. 숙희가 무수히 많은 히데코의 드레스 단추를 풀며 가슴에 대한 은유를 하는 앵글에서 보이는 날개뼈나 목선부터 이어지는 어깨선 등이 꽤나 섹슈얼하게 묘사되는데, 히데코의 시점으로 숙희에게 입힌 옷을 벗겨 줄 때에도 같은 구도가 나온다. 숙희와 히데코는 서로를 착실하게 욕망한다. 이 관계에서 왜 숙희가 히데코의 우위에 설 수 없는지는 분명하다. 숙희가 히데코를 조금 더 연민하기 때문에. 숙희는 제 손으로 정신 병원에 집어넣을 아가씨를 불쌍히 바라보며 생각한다. 가엾고도 가엾구나. 가짜한테 마음을 뺏기다니.
 
  우리 엄만 나 낳다가 돌아가셨어. 그러니까, 내가 엄마 목을 맨 거나 매한가지지.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히데코의 말에 숙희는 아가씨의 뺨을 두 손으로 감싸쥐고 말한다. 태어나는 게 잘못인 아기는 없어요. 갓난아기하고 얘기할 수만 있었어도 아가씨 어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셨을 거예요. 너를 낳고 죽을 수 있어서 운이 좋았다고. 하나도 억울하지 않다고. 두 사람의 결말이 있기까지 소비되는 장면 하나일지라도, 나는 이 대화가 참 좋다. 히데코에게 모성애를 느끼는 숙희의 마음이 이해되었기 때문에. 숙희의 엄마 대신 숙희를 거둔 보영당의 옥분 씨 숙희가 히데코에게 해 준 이야기를 그대로 해 주었기 때문에.
 
  이 영화의 앵글은 탁월하다. 등장인물들이 서로를 속이고, 각자가 수행해야 하는 역할에 집중할 때마다 화면은 무언가에 가로막힌다. 히데코가 좋아하는 버섯전골을 위해 버섯을 따러 간 숙희는 비가 오는 창문 너머로 사랑에 빠지게 될 두 남녀를 바라본다. 빌어먹게도 제 역할을 잘 수행해 주고 있음에도 화가 잔뜩 나 쿵쿵 소리를 내며 걷고, 버섯을 집어던진다. 창틀 너머로 비친 남숙희의 화가 난 두 눈만큼은 감출 수도, 가릴 수도 없다. 숙희는 거짓말에 서투르니까. 천지간에 아무도 없는 아가씨와, 그를 구원해 줄 후지와라 백작이 사랑에 빠지게끔 만들기 위해 둘의 사이를 가까워지게 만들며 숙희는 처음으로 이곳에 온 것을 후회한다. 화를 내고, 감정적으로 굴고, 배신감을 느낀다. 입을 맞추고 있는 아가씨와 백작을 보며 숙희는 자꾸만 알 수 없는 다짐을 곱씹는다.
 
 

나는 생각을 해야 돼. 나는 아주 부자가 되어서, 아주아주 먼 항구에 가고, 이름도 모르는 것을 먹고, 반짝거리는 것들을 잔뜩 사고, 그리고, 히데코 생각을 하지 않고. 히데코 생각을 절대…….

– 영화 〈아가씨〉 속 숙희의 대사

 
 

숙희가 히데코 생각을 하지 않겠다 다짐한 밤, 둘은 입을 맞춘다. 남자가 젖꼭지를 잡아당겨도 뭘 하자는 건지 모를 숙맥이라던 히데코에게 가여움을 느낀 숙희는 반쯤 녹은 사탕을 입술에 문지르며 입을 맞춘다. 키스를 알려 주기 위해. 그러다 문득 사탕 맛이 달라졌음을 깨닫는 장면이란. 쓴가 하면 새콤하고, 신가 하면 다디달고, 단가 하면 고소하고. 입술과 입술을 문지르는 법을 알려 주던 숙희가 멀어지자, 히데코는 꼭 기다렸다는 듯 숙희를 끌어당긴다. 두 번째 입맞춤에는 혀가 섞인다. 남숙희와 이즈미 히데코 첫키스는 아가씨가 먹던 사탕 맛이다. 두 사람은 그렇게 해 버린다. 솔직히 영화에 들어가는 배드신을 좋아하는 편이 전혀 아니지만, 이 영화에서의 배드신은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 장면을 넣지 않으면 분명히 숙희와 히데코의 관계를 사랑이 아닌 해방과 연대로 해석하는 사람이 생겨 버리기 때문에. 웃픈 현실이다.

 

“내가 사랑이 아니라고 해도, 내가 그분이 아니라 딴 사람을 사랑한다고 해도, 넌. 내가, 천지간에 아무도 없는 내가, 꼭 그분하고 결혼하면 좋겠어?”

“사랑하게 되실 거예요.”

– 영화 〈아가씨〉 속 히데코와 숙희의 대사

 
 

  계획대로 히데코의 마음을 얻기 위해 아가씨를 몰아붙이는 백작에게 숙희는 강렬한 증오와 분노를 느낀다. 화가 난 채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고, 돈을 주며 다른 일을 찾아보라고 신호를 보내는 백작에게 아가씨를 모시는 것이 저의 일이라고 설명하며 그 동전 한 닢을 다시 내려놓는다. 숙희가 아가씨를 모시는 하녀의 역할에 완전히 동화되었다는 점, 이제는 숙희에게 돈이나 보석보다도 히데코가 더욱 중요해졌다는 점을 간접적으로 표현하는 장면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고간에 숙희의 손을 가져다 대며 내가 얼마나 기대했는지 알겠느냐고 화를 내는 백작에게, 숙희는 불쾌한 표정으로 손을 털어내며 말한다. 부탁인데, 다시는 그 애기 장난감 같은 좆대가리에 내 손 갖다 대지 말아 줘. 숙희는 자신이 이곳으로 온 ‘목적’을 거스르지 못하고, 히데코의 발을 주무르며 말한다. 백작님 오시고 발톱이 부쩍 빨리 자라세요. 사랑하게 되실 거예요. 그건 어쩌면 배신에 가깝던 것.
 
  숙희를 이불장으로 밀어넣은 히데코는 증오와 배신으로 얼룩진 눈으로 숨을 씨근덕거린다. 그리고는 백작과의 결혼을 받아들이며, 그 커다란 저택을 몰래 떠난다. 이모가 자살했다는 커다란 벚나무에 걸려 있는 밧줄도, 비처럼 내리는 벚꽃잎도, 일식의 건축물과 유럽풍의 건축물이 나뉘어져 있다던 코우즈키네 저택도 전부 께름칙할 정도로 아름답다. 두 사람은 일본의 한 신사에서 부부가 되었음을 약속하고, 첫날밤을 보내고, 그렇게 부부가 된다. 부부의 연을 맺는 과정에서 해서는 안 되는 일들을 복창하는 과정을 거치는데, 거짓말을 하지 않겠다는 맹세에 히데코는 숙희를 돌아보며 입을 다문다. 그렇게 결혼 생활이 시작된다. 히데코는 점점 아기가 되듯 광증이 심해진다. 숙희에게 제 옷을 입히고,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고, 미친 사람처럼 굴기도 한다. 그런 히데코를 위해 검진을 나온 정신병원의 의사들이 숙희에게 히데코의 광증에 대해 물었고, 숙희는 입원이 필요한 정도라고 답한다. 정신병동 앞까지 함께 간 세 사람에게 모종의 반전이 생기며, 영화가 2부로 들어서는 타이밍이 참 예술이라고 생각했다.
 
  당신은 히데코를 숙맥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 숙맥이라니. 우리 이즈미 히데코 아가씨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그분은 처음부터 그냥 나쁜 년이다. 정신병동에 히데코의 이름으로 대신 끌려가는 숙희를 보며 웃음을 터뜨리는 아가씨와 숙희의 나레이션을 뒤로한 채, 과거편 시작. 아가씨의 본격적인 2부다. 이때 아가씨의 낭독회가 무엇인지 드러나는데, 화면서부터 압도되듯이 들어차는 탐미적인 앵글이 참 박찬욱표 영화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속한 소설을 낭독하던 이모의 등 뒤로 문이 열리는 순간 화면을 가득 채우는 풍경 같은 것들. 이모가 목을 맨 벚나무 아래서 숙녀가 된 히데코는 낭독회장에서 후지와라를 만나고, 그들의 계획은 이르고 비밀스럽게 완성된다. 후지와라 백작, 아니, 제주도 머슴과 무당 사이에서 백작 행세를 하고 있던 고판돌은 아가씨의 앞에서 거짓말을 하지 못하는 사내가 된다.
 
  결혼해 도망치자는 말에 히데코는 말한다. 하녀로 쓸 만한 계집아이를 하나 구해 주세요. 갑자기 사라져도 신경 쓰는 사람 없는 아이로. 좀 둔하면 더 좋겠죠. 들어가면 다시는 나올 수 없는 정신 병원이라는 데 집어넣기로 해요. 내 이름으로요. 이모부가 만들어 둔 허울의 공포 속에 히데코 대신 들어가게 될 계집아이. 그게 바로 숙희다. 하필이면. 아주 고맙게도. 첫 만남, 글을 읽지 못하는 숙희에게 히데코가 적어서 보여 준 이름은 ‘후지와라 히데코 백작 부인’이라고 적혀 있는 조선말. 벽 너머에 가려져 있는 진실들이 드러나는 순간. 히데코는 더 이상 순진하지도, 어리숙하지도 않은 여자가 되어 있다. 급변하는 분위기가 참 재미있는 것 같다.

 
 

얘 왜 이럴까. 왜 이렇게 쿵쾅거리면서 제가 화났다는 걸 표시 내고,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한숨 쉬고. 백작하고 마주칠 때마다 숙희의 눈은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당신 싫어요.
– 영화 〈아가씨〉 속 히데코의 대사

 
 

  두 사람은 느껴 본 적 없는 감정 속으로 나아간다. 히데코에게 숙희는 책에서만 보던 동무 같기도 하고, 아가씨와 제 옥문에 구슬을 넣고 흔드는 하녀 금란 같기도 하며, 실제로 저를 안아 주지도 못했던 엄마 같기도 한 존재다. 어리숙한 하녀와 아가씨 행세를 하던 두 사람의 감정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자꾸만 튀어오른다. 어제는 나를 버리지 않겠다고 약속하던 숙희가, 오늘은 백작을 사랑하게 될 거라고 속삭인다. 날 때부터 조금은 글러먹어 다른 사람이 저 때문에 미치려고 하는 것을 보면 기분이 조금은 괜찮았다던 아가씨는 하녀를 내팽개치고 달려가 이모가 목을 매달았다던 벚나무에 뱀처럼 똬리를 튼 밧줄을 감는다.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그것을 목에 걸고, 발을 내딛는 순간, 숙희는 어떤 거짓말도 할 수 없는 얼굴로 달려온다. 무엇도 아닌 이름으로. 옥주도, 타마코도, 동무도, 금란도, 엄마도 아닌 이름으로. 그것의 이름은 사랑이다. 모든 죄를 고백한다. 결혼하지 말라며 운다. 그런 숙희를 히데코는 목에 밧줄을 감고 내려다본다.
 
 

“숙희야, 내가 걱정돼?”
“…….”
“난 네가 걱정돼.”
“제 이름, 어떻게 아셨어요?”
“넌 네가 날 속여먹은 줄 알지. 속은 건 너야. 정신 병원에는 네가 들어가는 거라구. 내 이름으로 널 거기 가둬 놓고, 난 네가 돼서 멀리 달아나려고 했어, 그 새끼하고. 미안해하지는 않을게. 너도 날 등쳐 먹으려고 했으니까.”

- 영화 〈아가씨〉 속 히데코와 숙희의 대사

 
 

  이 영화에서 낭독회장은 정말로 ‘무지의 경계선’이 된다. 뱀을 지나 책으로 빼곡하게 들어선 낭독회장을 들어서는 순간, 등장인물들은 이 저택의 주인 코우즈키와 그의 처조카에 대해 많은 것들을 깨닫게 된다. 고풍스러운 양식 속에서 고요한 어투로 읽는 서적과 문이 열리면 보이는 정원의 풍경, 눈 오는 날의 낭독회장 등은 숨이 멎을 정도로 아름답고 매혹적으로 묘사된다. 앵글마저도 한 폭의 그림 같은 장면들과 그 속에 든 히데코를 욕망하듯 아주 노골적이면서도 은밀하고 또 아름답게 그들을 담는다. 코우즈키는 이 낭독회의 주최자이고, 그곳에 오는 신사 중 하나였던 후지와라는 히데코가 발음하는 문장들을 생생하게 떠올리며 얼굴이 시뻘개질 때까지 몰입하고 또 욕망한다. 그 사이에서 책을 읽고 나무 모형을 끌어안으며 소설 속 일부를 재연하는 히데코는 그 욕망의 주체이다. 코우즈키의 손님들이 성인 소설을 낭독하는 그의 처조카를 보기 위해 몰려들고, 코우즈키는 그곳에서 히데코가 읽은 희귀한 서적들을 판매한다. 히데코는 가지런한 옷을 입고, 학대에 가까운 훈육을 받으며 연습한 낭독법으로 실감 나는 연기를 하며 나긋한 말씨로 저속한 성인 소설들을 천천히 낭독한다. 무지의 경계선 안에서. 아무것도 모르지만, 모든 걸 아는 판타지적 여성상이 되어.
 
  나하고 좋은 데 갈래? 히데코는 이곳이 자신의 지하실임을 알고 있다. 이곳은 무지의 경계선. 숙희를 데리고 히데코는 그 경계선을 넘는다. 알아 버린 순간부터 절대 무지의 경계선 너머로 돌아갈 수는 없다. 그것이 뱀의 역할이다. 히데코가 앉아 있던 무지의 경계선을 지나온 것들이 얼굴을 붉히는 장면은 줄곧 보았지만, 그게 분노였던 적은 없어 히데코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고 숙희를 바라본다. 그 낭독회장에서 오로지 숙희만이 분노한다. 숙희가 히데코의 비밀을 전부 알아 버렸을 때, 히데코는 여전히 불안정한 얼굴을 하고 있다. 숙희가 이곳을 보고 자신을 떠날지, 혹은 남을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는 얼굴일지도 모른다. 일본 글은 배우지 않은 숙희는 매일 히데코가 낭독하는 책 속의 삽화에 그려진 스피넬을 알아본다. 이 공간이 무엇을 위해 만들어졌는지도.
 
  그 개새끼가 그렸어요, 이거? 그동안 이딴 거 읽어 줬던 거예요? 그 더러운 늙은이하고 신사분들한테? 경멸스러운 눈을 하고 화를 내는 숙희를 그저 불안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히데코는 이모부의 보물들을 분에 못 이겨 엉망으로 훼손시키는 숙희를 뒤따른다. 울 것만 같은 김민희의 표정 연기가 가장 고조되는 장면이다. 숙희는 히데코를 억압하던 것들을 제 손으로 파괴한다. 작중에서 ‘하녀’ 남숙희가 유일하게 제 손으로 직접 훼손시킨 것이 바로 제 가짜 이름 옥주를 연습하던 노트 위와 이 낭독회장이다. 책을 억척스럽게 찢어내고, 긁어내고, 야화가 그려진 두루마기를 칼로 죽죽 찢어내다 손이 베여도 숙희는 멈추지 않는다. 낭독회장에 설치된 인공 연못에 책들을 모조리 쏟아붓는 동안 히데코는 피처럼 새빨간 잉크를 그 위에 뿌려댄다. 숙희는 히데코를 그릇된 방식으로 묘사하고 욕망하는 상징들을 짓밟고 파괴한다. 히데코를 평생이고 억압하던 것들을 완전히 파훼한다. 숙희는 단 한 번도 망설이지 않고 낭독회장의 입구에 있는 뱀의 머리를 내리친다. 무지의 경계선이 파괴되는 순간이다. 히데코가 세상에 나오는 태동과도 같은 순간. 여기서 이 영화의 가장 유명한 대사가 등장한다.
 
 

겨울이면 훔친 가죽 지갑들을 엮어 외투를 만들었다는 유명한 여도둑의 딸. 저 자신도 도둑, 소매치기, 사기꾼.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나의 타마코. 나의 숙희.
– 영화 〈아가씨〉 속 히데코의 대사

 
 

  절벽과도 같은 담장을 뛰어넘어야 하는 히데코는 단 한 번도 가 보지 못한 ‘미지’ 앞에서 망설인다. 숙희는 그런 히데코를 재촉하는 대신, 짐가방을 계단처럼 쌓고 제 아가씨의 손을 붙잡는다. 좁고 시시한 높이의 담장이 히데코에게는 성벽보다도 더욱 드높앗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연출이 참 탁월했다. 그렇게 둘은 먼먼 들판을 향해 달린다. 동이 트고, 숙희와 히데코는 여명을 향해 달리며 웃는다.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는 조선의 들판을. 아가씨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이 아닐까. 히데코가 태어나 처음으로 맛본 열렬한 해방이 화면 안에 그대로 녹아들어 있었다. 히데코를 억눌러 온 것들을 파괴하고, 가슴에 화살촉처럼 박히는 나레이션을 남기고, 이 장면으로 이어지는 클라이맥스란 정말이지 탁월한 연출이다.
 
  그렇게 숙희가 정신 병동에 들어가고, 살짝 눈시울을 붉히던 아가씨는 끝나지 않은 역할 놀이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 백작과 함께 레스토랑으로 향한다. 사랑을 논하는 백작에게 아가씨는 말한다. 사랑? 사기꾼이 사랑을 아나요? 불이 난 정신 병원에 방독면을 쓰고 등장한 보영당 식구들과 함께 숙희가 히데코의 이름으로 그곳에서 사라지는 동안, 아가씨는 결혼 예물로 받은 아편을 술과 함께 섞어 제 잔에 따르고는 입안에 그걸 머금고 백작에게 키스한다. 솔직히 모를 수가 없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가씨를 욕망하는 마음이 더 커 속아 버리게 된 것뿐. 그걸 사랑이라고 포장해 주고 싶지는 않다. 살짝 더러우니까. 그렇게 후지와라, 아니, 고판돌이 눈을 떴을 때, 방 안을 가득 채운 지폐는 전부 사라져 버리고 코우즈키가 보낸 사람만이 그를 내려다본다.
 
  숙희는 아가씨가 되고, 히데코는 백작이 된다. 그들을 억압하는 것은 없다. 신분도, 성별도, 국적도. 그 무엇도 숙희와 히데코를 드러내고 손가락질할 수는 없다. 히데코가 백작을 통해 제 이모부에게 동봉한 편지와 함께, 마침내 완벽한 해방을 맞으며 끝나는 이 영화는 박찬욱의 전작들과는 달리 꽉 막힌 해피 엔딩이다. 이전 박찬욱의 작품들을 살펴보면, 주인공들이 지은 죄로 인해 반드시 불행해짐을 암시하는 결말이 주를 이뤘는데도 말이다. 사랑은 누구의 잘못도 될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을 쫓는 죄 또한 없다. 누군가를 욕망하고, 착취하고, 억압하던 지하실에서, 백작과 이모부는 우스운 최후를 맞는다.
 
 

존경하는 이모부께

나고야의 백작 앞에서 흠 없는 일어를 말한답시고 귀족적인 목떨림까지 연구하시는 모습을 지켜볼 때마다 제 마음이 얼마나 짠했는지 모릅니다. 이제 그럴 필요가 없다는 소식을 전할 수 있게 돼서 참 기뻐요. 그 사람, 제주도 머슴의 자식이거든요. 참, 제 선물은 잘 받으셨겠죠? 제 선물한테 조선말로 좀 전해 주시겠어요?
 
미안하지만 현실 세계엔 억지로 하는 관계에서 쾌락을 느끼는 관계는 없다고. 그리고, 세상에 많고 많은 계집애 중에 하필이면 숙희를 보내 줘서, 약간 고맙다고.

 
 

  이렇게 영화는 마무리된다. 수은으로 가득 찬 지하실에서 숨을 들이키면서 히데코를 상상하는 후지와라, 그리고 그의 장갑과 반지를 바다에 던지는 숙희와 히데코. 그리고 구슬 소리가 들리는 배를 마지막으로. 다 담지는 못했지만, 언제나 박찬욱 감독의 작품은 대사가 아주 오래 기억에 남는 것 같다. 가슴에 콕 박혀 자꾸만 곱씹어 보게 된다고 해야 할까. 실제로 내가 박찬욱 감독의 작품 중에 제일 좋아하는 영화로 꼽는 작품이기도 하다. 헤어질 결심도 재미있게 봤는데, 그것도 리뷰를 적어 보고 싶다. 이건 어쩌다 보니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다 적어 버린 감이 없지 않지만, 그래도 그건 좀 조절하면서 적어 볼 수 있을 것 같아서. 작년 여름쯤부터 적기 시작한 영화 리뷰를 올해 여름에 완성하게 되다니. 정말 상상 이상의 게으름이라 나도 내가 놀랍다.
 
  이 영화가 나오고 한동안 아가씨를 검색하면 김민희와 김태리로 검색창이 꽉 채워지는 것이 참 좋았다. 페미니즘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영화인 것과는 별개로, 박찬욱의 여성상이 페미니즘과 그리 연관이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하지만 박찬욱이 그리는 욕망하는 여성들이 참 좋은 것 같다. 아가씨라는 영화의 제목도 아저씨들이 더럽힌 이름을 돌려주자는 의미에서 지었다고 한 인터뷰가 꽤 인상에 남는 걸 보면. 적어도 내 취향이 변할 때까지, 박 감독이 그리는 여자들은 나에게 아주 깊은 잔상을 남길 것 같다.
 
  영화 오래 만들어 줬으면 좋겠다. 한국에서 신작 개봉하면 무조건 극장에서 보고 싶은 감독이 둘뿐인데, 하나는 박찬욱이고 하나는 장재현이다. 애국 항일은 이미 말아 주는 사람 많으니까 장재현도 하루 빨리 그뭔씹 오컬트의 장으로 복귀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나는 장감이 마는 오컬트, 박감이 마는 멜로 아니면 안 되는 사람이니까는. 이건 대체가 불가능한 마음이다. 마치 아가씨 옆의 남숙희 느낌으로다가.
 
  한국 영화 파이팅이다. 아래는 가장 좋았던 나레이션과 들판 씬.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나의 타마코. 나의 숙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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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씨

어릴 적 부모를 잃고 후견인 이모부(조진웅)의 엄격한 보호 아래 살아가는 귀족 아가씨(김민희). 그녀에게 백작이 추천한 새로운 하녀가 찾아온다. 매일 이모부의 서재에서 책을 읽는 것이 일상의 전부인 외로운 아가씨는 순박해 보이는 하녀에게 조금씩 의지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하녀의 정체는 유명한 여도둑의 딸로, 장물아비 손에서 자란 소매치기 고아 소녀 숙희(김태리). 막대한 재산을 상속받게 될 아가씨를 유혹하여 돈을 가로채겠다는 사기꾼 백작(하정우)의 제안을 받고 아가씨가 백작을 사랑하게 만들기 위해 하녀가 된 것. 드디어 백작이 등장하고, 백작과 숙희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아가씨의 마음을 흔들기 시작하는데… 돈과 마음을 뺏기 위해 서로 속고 속이는 매혹적인 그들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평점

6.8 (2016.06.01 개봉)

감독

박찬욱

출연

김민희, 김태리, 하정우, 조진웅, 김해숙, 박기륭, 문소리, 한하나, 이용녀, 곽은진, 이동휘, 이규정, 김시은, 타카기 리나, 원근희, 조은형, 이윤재, 최종률, 최병모, 한창현, 김인우, 권혁, 임형태, 김리우, 안성봉, 박신혜, 이윤재, 하시연, 김준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