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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가는 비행기 안에서 박찬욱 감독의 영화 〈아가씨〉를 보았다. 사실 이 영화와는 초면이 아니다. 몇 번이고 돌려보았고, 감탄했고, 몰랐던 부분들을 찾아내며 오래 좋아하다 잠시 잊고 살았던 것뿐. 네 시간 반이라는 불편한 비행을 뭘 하며 보낼까 고민하다 조금 충동적으로 아가씨를 골랐다. 내가 알아본 미장센이나 연출들이 과연 영화의 몇 할을 이루고 있을지 가늠이 되지 않아 참 아쉽다. 영화를 조금 더 정확하게 보는 눈을 기를 수 있었더라면 할 말이 아주 많을 텐데.     아가씨는 비 오는 날 기차를 타고 왜놈 집의 하녀로 들어가는 주인공을 배웅하는 보영당 식구들에서 시작한다. 원작은 세라 워터스의 장편 소설 핑거 스미스, 배경은 일제 강점기다. 영화의 시작 부분에서 장댓비가 내리는 길을 일본 군복을 ..

김보라 감독의 첫 장편 영화 〈벌새〉를 보았다. 벌새의 주인공은 대치동 아파트에 사는 중학교 2학년 김은희. 제각기 다른 시선으로 극중 등장인물들은 은희를 바라보고, 대하고, 소통한다. 은희를 사랑하고, 은희를 미워하고, 은희를 생각하는 사람들 속 은희의 세계를 오롯이 은희의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는 영화였다. 은희를 위한, 은희에 의한 영화. 은희를 감싸고 있는 세계와 그 안에서 피어나는 은희의 세계. 우리는 1994년도 대치동 은마 아파트로 돌아가 본다.   지나친 학벌주의와 그로 인한 경쟁이 사회를 삭막하게 만들고 있을 때쯤의 강남구 대치동은 그야말로 발 디딜 곳도 부족한 작은 계단들을 빼곡하게 이어 놓은 것처럼 치열하고 막막해 보였다. ‘좋은 대학에 가는 게 답’이라는 만국 공통의 따분한 인생 해..